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일본의 반응 === 이 시점부터 일본 제국의 모든 군부는 더 이상 연합군을 상대로 어떠한 형태의 흥정과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걸 드디어 인정했다. 원폭이 히로시마의 1회성 단발 이벤트 형식이 아니게 된 이상 언젠간 핵탄두가 전쟁 내내 폭격을 비껴간 교토에 떨어질 게 사실상 확정되었으며[* 그러나 하술하듯 실제 3번째 투하 예정지는 고쿠라였고, 이미 트루먼과 스팀슨의 주장으로 인해 교토는 작전상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일본 군부가 이를 알 턱이 없었다.], 황실의 정신적 수도인 교토에 버섯구름이라도 피어오르는 그 순간 일본 제국군은 모든 형태의 명분까지 잃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한다면 국민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일본 수뇌부에겐 참혹한 [[할복|최후]]만이 기다릴 것이라는 인식이 지휘부 대부분의 머리에 단단히 박히게 된다. 항복 내용은 '''[[1945년]] [[8월 15일]]''' 정오, 이른바 [[옥음방송]]이라 하는 [[쇼와 덴노]]의 녹음된 목소리를 직접 방송하였다. 일본 국민들은 [[천황]]을 신적 존재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옥음 방송은 중계기를 통해 방송되는 방식이라 라디오 음성은 그닥 깔끔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1945년 8월 15일, [[조선]]은 여느 날들처럼 조용했다. 다음날 재방송이 나온 후에야 전국 거리에서 '대한 독립 만세'가 요란했다고.] 또 그 내용이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면 알아듣기가 매우 힘든 [[일본어]] 고문어체로 작성되어있었다. [[옥음방송]] 문서로. 때문에 이게 처음 방송될 때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몰랐다고 한다.[* 당시 방송을 들었던 어느정도 일본어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고사하고, 같이 있던 일본인들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 해 멀뚱멀뚱했다고 한다.] 그 후 방송요원이 일상 언어(일본어 구어체)로 해석해 재차 방송하여, 마침내 항복 사실이 대중에 알려질 수 있었다. 그나마 결정된 항복에 대해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청년 장교들이 반발하며 쿠데타를 일으키고 [[사단장]]이 총격을 당해 사망하며 천황이 거주하는 [[쿠데타|궁성이 반란군에 의해 점령]], 쑥대밭이 되는 등 [[쇼와 덴노|히로히토]]고 나발이고 화평파를 싸그리 잡아 죽이려고 시도한 [[궁성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천황에 대한 군부의 충성이 진실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 외에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은 자들도 자살하거나 [[카미카제]] 공격에 참가하는 식으로 반항했고, 그 와중에서 항복 선언이 발표되게 된다. 때문에 항복을 결정한 날이 '''[[일본 패망 하루전|일본의 가장 길었던 날]]'''로도 불린다. 당시 [[필리핀]]에서 미군 포로 생활을 하던 작가 오카 쇼헤이는 소련의 관동군 공격과 [[스웨덴]]을 통한 일본의 항복 요구 타전을 발표한 [[8월 10일]]을 '포로들에게 사실상의 전쟁이 끝난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 의하면 비슷한 시기에 항복이 장교들에게 알려졌다. 즉 10일부터 15일까지 죽은 사람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은 것으로, 왜 항복 요구 타전 후 대국민 발표를 늦게 했는지 한탄하고 있다.[* 교전도 교전이지만, 항복 당일까지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이 계속되었다. 가장 어이 없는 게 [[아키타]]인데, 항복 전날인 8월 14일 늦은 밤부터 항복 당일인 8월 15일 아침까지 100기가 넘는 B-29의 공습을 받아 2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했다.] 이미 1945년 초부터 항복 논의가 오갔음을 상기한다면, 두 원자폭탄은 그러한 결정에 쐐기를 박은 사건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소식을 접한 소련은 자기 몫을 챙기기 위해 잽싸게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격]]하게 된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이는 좀 복잡하다. 분명 소련군의 대일전선 참전 기간은 일주일 안팎으로 대단히 짧고 극동에서는 미국보다 그 공로가 매우 적은 건 사실이나 소련의 일본 공격 준비가 양과 질에서 대단히 우수했고, 그 준비 기간이 독일의 항복 직후부터 면밀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결코 하루 이틀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미국이 소련에게 일본으로의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었고, 참전 시점까지 못을 박은 상황이었다.[* 단, 대소 유화책을 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즈벨트]]와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해리 S. 트루먼|트루먼]]은 대일전선에서 소련을 최대한 배제하려 노력했다. 소련의 참전은 이미 사망한 루스벨트와의 약속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련은 약속에 따라 유럽전선에서 수십만의 병력과 수만대의 장비를 지구 반대편의 [[동아시아]] 전선까지 가져왔고, 참전 약속일의 마지막 날에 전격 침공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소련군이 준비한 노력만큼 이미 잡병이 된 수십만 일본 관동군은 대부분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무장해제했다.[* 게다가 만주 침공을 지휘한 사령관은 [[게오르기 주코프]]와 함께 소련군 최고의 명장 투톱이었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였다.] 다만 원폭 투하로 자극 받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은 극동의 바실렙스키에게 전화를 걸어 만주 작전의 조기 실행을 명령한 것은 사실이며, 작전 기획시 당초의 공격 실행 예상 시점은 45년 8월 중순이었다가 8월 15일 이후로 단축되고, 최종적으로 8월 9일 0시에 공격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